성공회 람베스 통신

News & Musings from the Lambeth Conferenc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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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베스 회의, 무엇을 남겼나?

September 2nd, 2008 · 2 Comments · 동정, 성공회 계약, 이슈, 인다바

(주: 성공회 신문 편집인의 요청으로 이번 람베스 회의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급하게 적었다. 그런데 지면 관계 상 여러 내용이 빠져서, 여기 저기를 생략해서 원래보다 짧은 글이 나갔다. 아래에 원래 글을 옮겨 놓아 참조하도록 돕고자 한다.)

람베스 회의?

2008년 람베스 회의가 끝난 마당에야 비로소 람베스 회의를 소개하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다. 이 참에 몇 가지 상반될 듯한 생각을 적어볼 수 있겠다. “워낙, 우리는 세계 성공회에 관한 일에 무관심해서 성직자나 신자들이나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혹은 “람베스 회의는 그야말로 주교님들만의 회의인데다, 성직자나 신자들이 넘보고 염려하기에 너무 큰 일들이니 잠자코 사후에 보고나 들을 일이다.” 혹은 “그 회의가 중요하다고는 들었는데, 어떤 법적, 치리적 권한이 없으니, 무슨 결정이 나오는 우리 교회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더라.” 그도 아니면, “람베스 회의가 도대체 뭐야? 우리와 무슨 상관인데?”

이런 물음은 뜬금없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람베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 회의에 대한 영국 성공회 신자들의 반응을 보도한 영국 신문들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모으고 고쳐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관심한 표정들에도 람베스 회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엿보인다.

그럼 우리 한국 성공회 신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이들보다는 한국 성공회 신자들이 이 회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듯하다. 어머니 연합회 성가대가 와서 콘서트를 열고, 관구 단위에서 한반도 평화 포럼(TOPIK)과 같은 특별 시간을 가진 관구는 별로 없었던 것만 봐도, 우리 한국 성공회가 얼마나 람베스 회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심과 함께 람베스 회의를 둘러싼 이야기, 그리고 이번 회의의 내용과, 그 결과물들이 한국 성공회, 나아가 세계 성공회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우리 교회의 선교 활동을 세계 다른 교회들과 지속적으로 나누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겠다.

람베스 회의 역사는 세계 성공회의 역사

간단히 말해서, 람베스 회의는 10년마다 세계 성공회의 모든 주교들이 캔터베리 대주교의 초청으로 모여 열리는 주교 회의이다. 다른 의견도 더러 있지만, 람베스 회의는 세계 성공회의 실질적인 형성을 의미한다는 역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첫 람베스 회의가 열리기 전인 1867년까지만 해도 성공회는 영국성공회, 캐나다성공회, 그리고 미국성공회와 같은 독립적 교회들과 이런 교회들의 선교로 세워진 여러 나라의 지역 교회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성공회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교회들의 세계적인 공동체적인 친교(communion)를 통하여 선교적인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서로 돕기 위해서, 캐나다성공회가 제안하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초청하여 소집하는 방식으로 첫 모임이 열렸다.

이후부터 세계성공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람베스 회의를 통하여 세계 여러 성공회들의 연대감과 일치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람베스 회의와 캔터베리 대주교가 세계의 어떤 관구나 교구에 법적 치리적 권한을 갖는 기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갖지 의구심도 있었다. 이 염려때문에 첫 람베스 회의에는 요크 대주교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이 불참했다. 결국 람베스 회의는 이런 권한과는 전혀 관계없이 세계성공회의 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한 주교들의 선교적, 사목적, 신학적 논의 구조가 되었고, 이러한 대화 구조를 세계 성공회 일치의 한 도구로 삼았다.

일치와 대화를 위한 람베스 회의

그런데 1998년 람베스 회의에서 이러한 일치에 난기류가 생겼다. 그 이전부터 세계 성공회 안에서 논쟁 중이던 [인간의 성] 문제와 관련하여, 1998년 람베스 회의는 서로 상이한 듯 보이는 절충안을 [결의안]으로 채택했다. 즉 동성애는 성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내용과 함께, 동성애자들이 차별받아서는 안되고 교회는 그에 대한 보살핌을 지속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전반적인 우세와 강조는 전자에 있었다.

이런 참에 몇 가지 일이 벌어졌다. 2002년 캐나다 성공회 웨스트민스터 교구는 동성애자의 시민적 결합을 축복하는 예식을 통과시켰다. 2003년 미국 성공회 뉴햄프셔 교구 의회는 교구장 출마 시기에 동성애자인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진 로빈슨 신부를 주교로 선출하고, 몇 달 후 미국성공회 관구 의회를 통해서 승인을 받아 당해 11월 주교로 성품했다. 한편 이에 반대하여 몇몇 교회들과 성직자, 그리고 다른 나라의 관구들이 미국 교구 관할 지역에 자신들의 사제와 주교를 보냈다. 다시 말해 교구 관할 지역 침범이 일어난 것이다.

2004년, 캔터베리 대주교는 람베스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러한 논란이 야기할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대책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나온 [윈저 보고서]는 이 일애 연루된 교회들이 이 모든 행동들을 잠정 중지하고 일치를 판가름할 [성공회 계약] 작성을 안했다. 그리고 지난 몇년 사이에 [성공회 계약]의 초안들이 나왔다.

하느님의 선교를 통한 일치

2008년 람베스 회의는 세계 성공회는 이러한 분열 위기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열렸다. 회의에 앞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령강림절 특별 서신에서 이번 람베스 회의가 관심해야 할 방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양떼를 보살피는 사목자로서, 우리는 어떤 낮은 단계의 합의를 찾으려거나, 서로 정중하게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동의를 구하자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성령의 불을 구합니다. 그 불은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 제공된 하느님의 은총을 신실하게 선포하기 위하여 서로를 위하여, 서로에게 책임있게 행동하고, 그리고 하느님께는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더해 줍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길은 고통스러울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즉 가난과 폭력과 불의로 각인된 세계에 도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 드러날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잠재력은 매우 큽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바는 우리 세계성공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려는 것이고, 모든 주교들이 선교에 좀더 효과적으로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영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길 안에서 우리를 묶어 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선교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그래서 2008년 람베스 회의의 주제는 “선교 안에서 바라본 주교”였다. 하느님의 선교적 명령 안에서 주교들이 지도자로서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이를 위해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를 스스로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이를 위해서 세계 성공회가 각자 처한 선교적 상황의 다양성에 대한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것이 이번 람베스 회의가 바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2008년 람베스 회의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이끄는 3일간의 피정과 더불어, 매일 성서 연구(요한 복음), 그리고 인다바 그룹을 통하여 선교 주제와 상황을 경청하는 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루 하루의 일정은 성공회의 전통적인 전례 생활(성찬례와 성무일도)을 통해 그 틀이 마련되었다.

이번 람베스 회의가 과거와 다른 점은, 회의 결과 어떤 결의안이나 선언서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동안에 기도하고 공부하고 경청하며 나눈 고민들을 반영한 보고서를 채택하고, 이를 통해서 지속적인 선교적 고민과, 대화와 일치를 위한 노력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런 발판의 시작은 “인다바”라는 대화 모임을 통한 것이었다.

“‘인다바’는 줄루(Zulu) 말로 어떤 목적을 갖고 토의하려는 모임을 가리킨다. 이는 참여하는 과정과 참여하는 방법이라는 이중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닥쳐있는 도전들에 관하여 서로 경청하고, 이를 세계 성공회에 적용시키려는 것이다…이러한 토론의 목적은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좀더 깊은 수렴점을 찾으려는 것이며,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생각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뤄질 것이다.” (람베스 자료집)

물론 이러한 대화와 경청이 생각만큼 완벽히 진행되지는 않았다. 대다수 65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했지만, 무엇보다도 람베스 회의 개최 자체를 반대하는 많은 주교들이, 람베스 회의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열고 캔터베리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동조하는 약 150 여명의 주교들이 참석과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 사이에서 확인된 것은, 세계 성공회가 그 어떤 분열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위한 상호 협력과, 각각의 선교 상황이 가져다 주는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서로 열려 있어야 하며,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람베스 회의 2008년 보고서는 논쟁적인 여러 문제들보다는, 무엇보다도 성공회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 주어진 선교 사명에 어떻게 충실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실제로 람베스 회의 기간 동안 주교들은 세계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기 위한 가두 행진을 런던 시내에서 벌였고, 편만한 사회의 불의와 지구 환경 문제 해결에 공동 협력하자는 선교적 일치를 다짐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성공회와 일본 성공회는 갈등하고 분열하는 세계 성공회에 매우 강력하고 도전적인 화해와 일치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로써 세계성공회는 양 교회의 동북아시아의 평화 선교 협력을 본받기로 하고, 그 노력을 보고서에 반영하기도 했다.

람베스 회의는 무엇을 남겼나?

2008년 람베스 회의의 결과와 세계 성공회의 미래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이번 회의는 세계성공회의 위기를 야기시키는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이러한 대화는 몇 가지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교라는 좀더 큰 지평 안에서, 각각의 선교적 상황과 주어진 사명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거기에 어떤 희망이 존재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그렇지 않다면, 성공회의 일치와 선교의 미래는 어두우리라는 전망이기도 하다.

람베스 회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최근 캔터베리 대주교는 람베스 회의 이후 세계 성공회에 보낸 사목 서신에서 이 염려와 희망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신뢰하시고, 하느님의 여러 선물을 세계 성공회에게 주시는 것을 함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계 성공회를 통하여 주시려는 더 많은 선물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은총과 도움을 요청하며, 이를 받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뿌릴 씨와 먹을 빵을 농부에게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뿌릴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십니다’ (2 고린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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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접으며 - 감사의 말씀

August 15th, 2008 · 4 Comments · 동정, 블로깅, 여정, 일상

품었던 계획에 비추면 보잘 것 없으나, 부족한 대로 이 블로그를 접습니다. 한동안의 외유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그동안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여러모로 후원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신 성원에 못미쳤지만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그 따뜻한 마음들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각지에서 댓글로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서로 소통하고 격려하는 모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보이지 않는 원근 각지의 독자들에게 두 손 모아 사례합니다. 그 관심과 소리없는 격려가 이 블로그를 만들게 했습니다. 모든 방문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 몸도 집에 돌아왔으니, 블로그도 제 집으로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이제 거기서들 뵙지요.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아름다움을 우러르며, 자유와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모든 분들께 깊이 머리 숙여 합장.

주낙현 신부

http://viamedi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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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or, si monumentum requiris, circumspice

August 15th, 2008 · No Comments · 동정, 블로깅, 여정, 일상

(글 제목 역: “독자들이여, 기념비를 찾는다면, 주위를 둘러보라.”)

8월 3일 마침 성찬례를 마치고, 밤 늦게 런던으로 돌아와서 닷새를 런던에서 보냈다. 지인들을 만나고 런던에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들(브리티시 뮤지엄,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 등)은 경이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지난 3주 간의 람베스 회의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움”과 “상상력”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일구어야 할 아름다움과 상상력은 무엇인가? 교회(사목)와 신학은 사람들에게 어떤 아름다움을 우리 삶 속에서 꽃피울 수 있도록 도우며, 그 아름다운 삶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이 질문 속에서 바라보자니 3주간의 람베스 회의보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움들이 더욱 크고 장엄했다. 그것은 또다른 화엄(華嚴) 세계를 비추는 듯 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바랄 것은 무엇인가?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방문해서는 곧장 지하 성당(crypt)을 찾았다. 이 성당의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1732-1723)의 무덤과 그 비문을 느껴 보기 위해서 였다.

Subtus conditur Hujus Ecclesias et Urbis Conditor, CHRISTOPHERUS WREN; Qui vixit annos ultra nonaginta, Non sibi, sed bono publico. Lector, si monumentum requiris, Circumspice. Obiit 25 Feb. MDCCXXIII., aetat. XCI.

“이 아래 이 교회와 도시의 건축자인 크리스토퍼 렌이 묻혀 있노니, 구십 평생을 넘게 살았으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살았노라. 독자들이여, 그의 비문을 찾거든, 당신 주위를 둘러보라. 1723년 2월 25일 91세의 나이에 별세”

사실 이 비문말고 그 거대한 석조 건물은 거대함 이상의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원래 성당의 화재에서 살아남아 이 성당 벽 한켠에 서 있는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 조상(effigy)은 그의 시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는 이곳 세인트 폴 성당에서 주임 사제로 짧게 재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사실 그의 설교의 한 대목이지만…)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그 누구도 섬처럼 떨어진 자가 아니며 그 전체요, 한 사람은 그 대륙의 한 부분일 뿐이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웨스트민스터 성당(Westminster Abbey)에서는 또다른 시인들을 만났다. 성공회 신자였던 W. H. 오든 (W. H. Auden: 1907-1973)의 기념비문이 마음을 붙들었다. 그가 W.B. 예이츠(Yeats)를 기념하여 쓴 시의 한 구절이 그 자신을 기리는 말로 새겨져 있었다.

“In the prison of his days / Teach the free man how to praise.”

이 풍경과 짧은 비문들이 또다른 생각으로 이끌어 간다. 교회 안의 한 성직자로서, 세상에 던져진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어떤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낼 것인가? 어떻게 자유로운 이들에게 노래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인가?

그러나 이는 한 개인의 성직자도, 세상의 모든 주교들도 만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자칫 그것은 그 주어진 권위때문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하느님을 나누고, 이에 대한 깊은 성찰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삶을 위해 돕고, 이를 기뻐하고 향유하는 일이 필요하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삶의 아름다움을 기뻐하고 함께 향유하는 일도.

며칠 동안 런던에 머물면서 나는 그 향유에 대한 갈망으로 많이도 걸었다.

블로그 독자들이여, 생의 기념비를 찾는다면, 당신과 당신 주위의 삶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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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올린 글 목록

August 15th, 2008 · No Comments · 동정, 블로깅

미처 마치지 못하고 끄적거려 놓은 것들을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돌아와서도 몽롱한 정신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요. 이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포기할 것을 일찍 내려 놓고, 몇가지만 다시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일정에 따라 소식과 관련 글을 올린 탓에 첫 화면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최근 새로 올린 글의 목록을 적고 연결합니다.

꼭 올려야지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특히 최종 의견 [반영] 보고서를 위한 공청회가 두 차례 더 열려서 훨씬 열띤 논쟁이 오고 갔는데, 그 내용을 짧으나마 올릴까 했지만 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가 다시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댓글에서 궁금해 하신 것에 응답하고자 톰 라이트 주교와 관련된 글도 계획해 놓았는데, 그분의 인터뷰와 람베스 회의 기간 동안에 행한 강연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또 자칫 이런 글이 어떤 편향으로 오해받을까 주저하는 것도 있고요.

어떤 일이 끝나면, 특히 그것이 논쟁적인 것이라면, 뒷 이야기들이 많은 법입니다. 여기서 드러내지 못하는 숱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이 공간이 적절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삼가하고 이 블로그를 접으려는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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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전통과 생명의 둥지 - 두 조상(彫像)을 보며

August 5th, 2008 · No Comments · 동정, 신학, 일상

말보다는 풍경 하나가 더 많고 깊은 것을 전해주는 일이 많다. 회의 기간 동안 캔터베리 대성당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첫 방문 때부터 내 눈을 사로 잡은 것이 있다. 캔터베리 대성당 외부 벽에 세워져 있는 여러 조상(彫像)들이다.

lc_becket.jpg맨 처음 눈길을 잡는 것은 목이 잘려나간 조상이었다. 바로 순교자인 토마스 베케트 캔터베리 대주교(1118-1170)이다. 사실 왕권(헨리 2세)과 대결하여 순교당했던 탓에 캔터베리 대성당은 더욱 유명한 순교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입상이 가장 먼저 순례자들을 환대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또다른 수모를 당해야 했다. 헨리 8세는 다시 종교 권력을 세속 왕권에 굴복시키려 했다. 그렇다면 “대성당의 살인”(T.S.Elliot)의 주인공인 베케트라는 상징이 그리 곱게 보일리 없었다. 헨리 8세는 다시 베케트의 목을 쳤다. 목이 없는 그의 입상은 이런 권력을 둘러싼 싸움의 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 주위에 역사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조상들이 펼쳐져 있다. 엘리자베스 1세도 입구 가장 양지 바른 쪽에 도도하게 서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내 눈을 사로 잡지 못했다.

성당 정문 입구 외곽으로 돌아서면 양지와 그늘이 교대로 돌아서는 자리에 또다른 조상이 서 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그 명상적인 태도때문도 아니요, 그가 들고 있는 책에 대한 궁금증때문도 아니다. 바로 그 왼쪽 어깨 위에 틀어진 새의 둥지 탓이다.

바로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44-1600)의 입상이다. 그는 이른바 성공회 신학의 “방법”을 정초한 사람이다. 성공회 신학은 확정된 교리적 체제나 교리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방법”이요 “태도”이다. 그것이 성공회 신학의 전통이 되었다. 사실 그것이 전통을 살아 있게 하고, 그 전통 안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한다. 리차드 후커의 입상은 그걸 웅변하고 있었다.

lc_Hooker.jpg

교회사가 야로슬라브 펠리칸은 [전통의 옹호] The Vindication of Tradition (1986)에 이런 경구를 남긴 바 있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요,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Tradition is the living faith of the dead, traditionalism is the dead faith of the living.)

성당 방문객들의 관심이 귀퉁이에 있는 이 후커와 그 어깨 위에 튼 새의 둥지에도 닿았을까? 이 풍경은 세계 성공회와 람베스 회의에 어떤 뜻을 건네고 있을까?

독자들 가운데 혹시 캔터베리 대성당을 방문하실 일이 있거든, 성당 클로이스터 바깥 잔디밭에 바르게 누워 있는 윌리암 템플 대주교(와 그의 아버지 프레데릭 템플 대주교)와 그 건너편 그늘 벽에 박혀 있는 마이클 램지 대주교의 기념석도 살펴 보시면서, 리차드 후커 어깨 위에 둥지 튼 새들에게도 문안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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