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람베스 통신

News & Musings from the Lambeth Conferenc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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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식민주의, 그리고 캔터베리 대주교

August 3rd, 2008 · 6 Comments · 동정, 신학, 이슈

람베스 회의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영국 타임즈 온라인 판에는 이번 람베스 회의를 보이콧하기 위해 애썼던 우간다 관구장 헨리 오롬비(Henri Orombi) 대주교의 기고문이 실렸다. 그는 람베스 회의를 보이콧하려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않자, 이에 대응한 성공회 주교 모임(GAFCON)을 예루살렘에서 열었던 주도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실제로 GAFCON (글로벌 성공회 미래 포럼) 예루살렘 성명서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노라고 선언했다.

또한 오롬비 대주교는 람베스 회의 직전 우간다 주교원 회의를 열고, 우간다의 모든 주교의 람베스 회의 불참 결의를 이끌어 내고, 이에 불응할 때 적절한 징계를 조치를 하겠노라고 으름장까지 놓은 바 있다. 이 오롬비 대주교는 계속 진행되는 람베스 회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캔터베리 대주교에 치명타를 날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그의 기고문 전문 링크)

이 기고문에서는 특별히 캔터베리 대주교를 표적으로 삼아, 세계 성공회 안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직이 식민지의 산물일 뿐이라며, 천주교의 교황 선출에 빗대어 그 위치를 깍아 내렸다. 교황은 주교들인 추기경 가운데서 뽑히는데 비해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이라는 세속 정부에 의해 지명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또 그렇게 지명된 캔터베리 대주교를 세계 성공회 일치의 도구로 보는 것이야 말로 식민주의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언급들은 여러 가지 궁금증을 만들어 낸다. 하나는 이 분들이 말하는 “식민주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고, 오롬비 주교를 포함한 가프콘 주교들에게 내재한 실제적인 “식민주의”의 본연은 무엇일까 하는 것, 그리고 이들이 교황 선출 운운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를 공격하는 일 뒤에 담겨 있는 또 다른 두 가지 면들, 즉 세계 성공회에 교황제를 들여 오고 싶어 하는 것과, 성공회 전통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세계 성공회 내의 보수파들은 자주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해 가면서, 특별히 미국과 캐나다 성공회, 그리고 다른 “서양” 성공회의, 이른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비판한다. 역사적으로나 지금 당장 정치-경제적 의미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국가 권력과 겹치는 양상에서 사람들의 피식민지 경험을 자극하여 이들 나라 성공회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확장시키는데 적절하게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최근의 동성애 논쟁과 관련하여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풍미하는 신조어까지 멋대로 갖다가 붙인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같은 사람을 알리 없는 일반 사람들은, 널리 알려진 개념에 “이미지”만을 덧씌우는 이런 “수사”(rhetoric)에 넘어가기 일쑤다.

이들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혼란을 노리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이런 것이다. 미국은 누가 봐도 제국주의다. 그럼 미국 성공회는? ‘제국주의 나라의 종교(문화)이니 당연 그들의 행태는 문화적 제국주의다’는 단순 공식을 대중화한다.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저속한 행동에 저명하다는 신학자들도 그냥 눈을 감고서 스스로도 이런 대중화된 조작적인 수사학을 이용한다. 영국 더럼 교구장인 N.T. 라이트 주교가 그런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러나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강의까지 필요하지 않다. 말 그대로 풀어보자면, 우선 “사람과 문화를 강제적으로 이식하는 것”이겠고, 좀더 정치-경제와 관련된 입장에서 보자면, 그 식민지를 대상으로 어떤 권력 혹은 시장 관계를 통해서 그 자원을 착취하는 적극적이며 팽창적인 권력 행사이기도 하다. 또 이를 지탱하기 위해 동원되는 문화 이념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현재 세계 성공회의 동성애 논쟁과 관련해서 누가 이런 사전적 의미의 식민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실제로 이들이 연합하고 있는 미국 혹은 영국의 보수파 주교들의 많은 사람들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지배 행태에 대한 반성이 별로 없는, 오히려 변화된 오늘의 조건에서 새로운 제국주의를 부추기는 기독교 우파의 생리과 비슷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식민주의의 유산과 관련해서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오롬비 주교는 현행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두고 식민지적 유산이라고 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다면 제국주의적 유산이라고 했어야 하리라).

그러나 식민지적 유산은 스스로를 “글로벌 사우스”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가장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이 갖고 있는 성서 해석 방법이나, 교리에 대하 이해야 말로, 이른바 “선교사 시대”라 불리던, 특히 제국주의의 팽창과 병행되었던 그리스도교 선교 운동의 “문명 개화”(civilizing cultures) 이념의 유물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이들의 주장에서는 자기 맥락 안에서 진행한 신학적 고민의 산물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실제로 이들이 얼마나 식민지 선교 유산에 갇혀 있는지는 최근 가프콘의 예루살렘 성명서를 들여다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성공회 전통과 관련된 것 두가지만 지적한다. 우선 선언서는 영국 종교개혁 당시에 마련된 [39개 신앙 조항]을 “교회의 참된 교리”를 담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성공회 신자들에게 권위있는 것이라 치켜 올린다. 그런 다음 1662년 영국 교회의 공동 기도서를 “예배의 기도의 참되고 권위있는 기준”이라고 선언한다.

과연 그럴까? [39개 신앙 조항]은 종교 개혁 당시 논쟁의 산물이다. 그 상황을 통해서 읽지 않으면, 이 “역사적” 문서는 현대 교회 일치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될 여지가 많다. 1662년 기도서를 애지중지하는 이들의 태도는 실제로 세계 성공회의 전례 발전에 대한 고민보다는 영국 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으면 하는 바람, 혹은 영국 교회가 자신의 기준이라는 생각의 발로이다. 1662년 기도서를 스코틀랜드 성공회 신자들도 모본으로 인정할까? 흥미롭게도 람베스 회의에서 있었던 공청회에서 이와 비슷한 주장이 나오자, 곧장 스코틀랜드 성공회 주교들은 하나 같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직에 대한 생각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나도 신학교 때 어느 교수 신부님께서 볼멘소리로 “왜 캔터베리를 대주교를 영국 놈들만 해야돼?”라고 하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좀더 공부하고 교회 전통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게 생각 얕은 비판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알았다. 문제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전통은 몇몇 중요한 교구 혹은 주교직을 중심으로 가시적 일치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그뿐이다. 오히려 문제는 그 가시적 일치의 상징이 일치의 권력이 되는 순간이다. 로마 교회를 보라. 교황은 로마 교구의 교구장일 뿐이다. 다만 전체 교회(최소한 서방 교회)는 그 주교좌를 일치의 상징적 중심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그것이 권력이 되었던 것이 바로 중세 교회의 발전이요, 타락이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이런 선거로 뽑으면 탈식민주의가 되는가? 그래서 우리도 천주교의 교황처럼 성공회 교황을 뽑자는 발상인가? 여기에는 또다른 권력에 대한 향수가 있다. 최소한 지난 몇년 간의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의 캔터베리 대주교 흔들기 이면에는 “성공회 교황 만들기”가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직전 캔터베리 대주교이 조오지 캐리 대주교때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오롬비 대주교는 이런 계획을 썩 내켜 하지 않는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의 “지난 5년 간”에 대해 낙담을 드러낸다.

어쨌든 이런 교황적 캔터베리 대주교 일차 후보자라면 나이지리아의 아키놀라 대주교이다. 이런 권력 지향이야 말로 제국주의, 세계 성공회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식민주의가 아니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성공회 전통의 종교개혁 정신과 그 이후에 스스로 성찰하면서 발전시킨 전통에 대한 “배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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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sponses so far ↓

  • 1 차요한 // Sep 3, 2008 at 6:08 am

    식민주의시대의 성서해석방법을 유지하고 제왕적 교황제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권력욕의 발로인가요?…
    사실 명예의 수위권을 지닌 일치의 가시적 상징으로서 영국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저도 이런 저런 이유로 고민중입니다만.

  • 2 차요한 // Sep 3, 2008 at 6:16 am

    그리고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톰 라이트 주교님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소위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한국그리스도교출판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성공회 저자그룹(맥그래스, 스토트, 루이스, 패커 등)에 완전히 편입된 이 주교님의 온전한 진면목이 궁금합니다.

  • 3 fr. joo // Sep 3, 2008 at 3:42 pm

    차요한 / 어떤 힘에 관련된 갈등을 “권력욕”이라고 표현하면, 우리말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한 개인의 욕심’으로 치부되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치가 그렇듯이, 글로벌 사우스의 처지는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좀더 (교회 및 사회의) 정치적인 관계가 어떤 집단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에 이미 적어 두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일치의 상징적 도구로 보는 것에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오롬비 대주교의 비판도 이해할 만 합니다. 다만 제 생각은, 오래 전부터, 그리고 여러 교회 전통들 안에서 이용되고 있는 전통적인 원칙인 “Primus inter pares”를 되새기고 지키는 게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체제는 “교황제” 아니면 “개교회주의”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열거하신 이른바 “복음주의” 신학자들 (혹은 교회 지도자) 간에도 여러 차이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니키 검블(알파 코스 - 신학자는 아니지만)과 존 스토트는 성령과 교회에 대한 이해에서 다른 점들이 보입니다. 스토트(영국)보다는 패커(캐나다)가 훨씬 “퓨리턴”에 가깝습니다. 맥그래스는 그 어디서도 ‘동성애’와 같은 주제를 다루지 않고, 교회의 실질적인 사목적인 문제에 거리를 둡니다. C.S. 루이스는 이미 오래 묵어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복음주의’라는 틀에 잡기에는 어렵고 더 큰 분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싸잡아서 하나의 진영으로 보기보다는 그냥 개별적으로 접근하고 배우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톰 라이트는 독특한 분입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가르친 적이 있고, 그때문인지 영국보다는 오히려 북미에 많은 독자(스스로 ‘건전한 복음주의자’라고 일컫는)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분은 또 글로벌 사우스 혹은 영국 내의 수구적인 보수주의와도 여러번 선을 그은 적이 있습니다. 중간에 서는 것이 어려운 탓일까요? 아니면 중간에서 훈수두는 것이 쉬워서 일까요? 그분의 글은 아름다운 수사가 넘치는데 내용에서는 신선하고 도전적인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분이 세계성공회에 관련하여 쓰신 글에 한한 것입니다. 그 분의 저작들은 이와는 차원이 좀 다르다는게 중론입니다. 특별히 다른 여느 ‘복음주의’ 성서학자(?)들과는 큰 차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 분의 진면목까지 알아보시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 분보다 더 애써서 살펴볼 대가들이 훨씬 많은데요. ;)

  • 4 차요한 // Sep 4, 2008 at 1:00 am

    개인적인 이유는 없습니다만, 바람숨결님이 일전에 적으신 것 처럼, 그 분의 유명세가 한국 내에서 점점 커지는지라, 소위 복음주위를 자신의 신학적 둥지로 삼는 분들이 책으로 만나는 라이트 주교님 뿐만 아니라 성공회공동체 안에서 라이트 주교님의 위상과 위치 등에 대해 종종 물어보기 때문에 궁금했습니다^^

  • 5 fr. joo // Sep 4, 2008 at 2:18 am

    차요한 / 답변은 아니고요, 오타가 난 “복음 주위”가 흥미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해서 몇마디 적습니다.

    우리 (한국) 성공회 신자들이 다른 개신교 신자들과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이들에게 이미 알려진 존 스토트나 니키 검블이나, 혹은 알리스터 맥그래스, 그리고 이제는 N.T. 라이트를 예를 들어 거론하곤 합니다. 그 좋은 의도를 나무라거나 거절할 일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러면 ‘성공회’는 개신교인들에게 이상한 집단 혹은 이단이라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을테니까요. ㅎㅎ 그러나, 딱, 여기까지입니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이런 태도 자체가 무척 수세적, 혹은 수동적입니다. 다른 개신교에서 소개한 후에야, 그들이 그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인 이후에야,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고, 거기에 기대어 우리를 홍보하려고 합니다. 이래서야 우리가 그네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수세적인 입장에서는 우리는 그 사람들이취사선택한 입맛에 길들여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전통의 풍요로운 다양성의 전통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수용과 해석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성공회 내의 복음주의자들을 수용하려는 우리(한국) 성공회의 태도가 매우 비주체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에는 제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성공회 학자들의 탓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성직자들의 탓도 큽니다.

    한번 생각해 볼 문제여서 이 자리에 적어봤습니다.

    그나저나, “위상과 위치”를 궁금해 하는 분에게는 그걸로 판단하지 말고, 실제로 “복음 주위”(^^)를 신학적 둥지로 삼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으면 합니다. 이러면 사람들에게 너무 불친절한 답변이 될까요? 복음은 없고 “주의”만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

  • 6 차요한 // Sep 5, 2008 at 7:56 am

    옳으신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과 방법의 측면 모두에서 수세적이지요. 성공회 복음주의 저자 그룹의 사상이 한반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어떤 새로움을 전해줄 수도 없고 또 성공회정신의 장점들을 말해줄 수도 없습니다. 다만 평균보다 조금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개방적인 신앙을 요청하는 데에 그칠 뿐입니다. 또 이들이 작금의 성공회정신을 선도하는 사상가들도 아니구요.
    특별히 말미에 제안하신 내용을 실제의 대화에 어떻게 도입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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